한 남자가 해 질 무렵
골프장 출입 경비실을 지나
큰 길로 들어서기 직전의 길가에 프랑카드를 걸어놓고
'비방'을 팔고 있었습니다.
'골프가 짐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비방을 팝니다.'
언제부터 그 남자가 그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주 대낮에 보았더라면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남자의 몰골도 흉흉해서 펼치고 앉아있었다 한들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스름한 골목길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해질녘,
옛날 야간 낚시하는 사람들이나 썼을 법한 카바이트 불을 켜놓고
'비방을 판다'는 분위기는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골프를 마치고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놈의 골프 때려 치우고 말아야지' 라는 심사임이 뻔할 테니
그 음산한 분위기는 상당히 신비하게 보이기까지 했을 겁니다.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심정의 사람들이
간혹 차를 멈추고 을씨년스런 남자와 뭔가를 흥정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발견되곤 했습니다.
'비방이라는 것이 뭐요?'
'이 안에 써 있소'
한지를 돌돌 말아서 비단으로 한 바퀴 띠를 두르고
곱게 매듭으로 마무리 한 꽤나 정성을 들인
조금 굵은 나무 도장만한 크기의 물건입니다.
'이 속에 비방이 적혀있다는 말이오?'
'그렇소'
'얼마요?'
'3개에 10만원이요'
'왜 3개요?'
'하나를 먼저 보고,
그래도 안되면 또 하나를 보고,
그래도 안되면 마지막 하나를 열어보는 거요'
'미리 조금이라도 볼 수는 없소?'
'안되오'
……
사기 싫으면 말라는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내와
'기분도 꿀꿀 한데 속는 샘치고 한 번 사봐?' 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한 벌 주소!'
흉흉한 몰골의 사내가 당부합니다.
'집에 가서 푹 자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묘시가 지나기 전에
노란색 비단 띠가 둘러진 것을 먼저 열어서
가장 시선이 많이 가는 곳에 붙여놓으시오.
아무런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더라도
푸른색의 두 번 째 비방을 한 달이 지나지 않고서
열어보면 안되오.
붉은 색의 마지막 비방도 마찬가지고.
약속을 지킬 수 있겠소?'
……..
'그러겠소'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당부대로
묘시가 지나기 전 신새벽
매듭을 풀고 노란 비단 띠를 벗기고
곱게 말아놓은 한지를 펼칩니다.
별개 있겠어? 하면서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가볍게 손이 떨리기까지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반, 돈이 아깝다는 생각 반으로
돌돌 말린 한지를 펴자
이상하게 생긴 원 하나와 언뜻 알아보기 어렵게
휘갈겨 쓴 글씨
자세히 보니 '휘왼소원'이라 써 있습니다.
'이게 뭐라는 거야?'
'역시~그렇지'
무슨 뜬금없는 사기냐 싶어서 확 구겨서 휴지통에 넣으려던
사내는 혹시나 하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봅니다.
한 자 한 자 뜯어보니 글자에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시하고 사기 당했다 생각하며 며칠이 흘렀는데
잊을 만 하면 '스윙은…… 휘왼소원'
잊을 만 하면 '스윙은…… 휘왼소원' 자꾸 생각이 납니다.
위에 그린 원은 가만히 보니 스윙을 그려놓은 것 같은데
'휘왼소원'이 뭘까?
휘? 스윙은 휘두르기 다.
그래 '휘'는 휘두르기야
그러면 '왼'은 왼발? 왼손?
왼손으로? 왼쪽에서? 알 수가 없네.
사기를 당했다 싶으면서도
틈만 나면 '휘왼소원'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소'는 뭐지?
원은 원을 그린다?
스윙은 원을 그리는 거니까 원 그리기 다.
그렇지, 그렇지!
마치 퍼즐을 맞추기처럼 단어를 맞춰가고 있는 사이에
스윙이 뭔가?
스윙은 뭐 하자는 몸짓인가? 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스윙은 휘둘러서 원을 그리는 것이고
확 잘 휘두르면 소?
소원성취?
소탐대실?
소송?
소말리아
소가 풀리면 '왼'도 풀릴 것 같은데
입에서 맴맴 돌면서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걸 뜯어봐?
그러면 그 속에 답이 있지나 않을까?
아니 안되지 뭔가 뜻을 깨달으라는 걸 꺼야!
좀 더 생각해 보자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출장을 가느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추월차선으로 뭐가 그리 급한지 왠 차가 휙 하고 지나갑니다.
조금 있더니 또 한 차가 휙 하고 지나갑니다.
무심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휘왼소원의 '왼소'의 의미가
섬광처럼 떠 오릅니다.
'왼쪽에서 소리 나는' 이구나
그래 그래
스윙은 휘둘러서 왼쪽에서 소리 나는 원을 그리는 거야
맞다.
거리를 내는 것은 힘이 아니고 헤드의 스피드 인 것이고
임팩트 존을 지나면서 최대의 스피드가 되니까 소리는 당연히
왼쪽에서 나는 거겠지
그래 이제야 알았다
스윙은 휘둘러서 왼쪽에서 소리 나는 원 그리기
휘왼소원이구나
휘왼소원을 발견한 것이 너무도 기뻐서
하루 자고 올라올 출장 계획을 바꿔서
얼른 일을 마치고 다음 '비방'을 뜯어볼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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