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밥통아 / 윤성학
사랑이 밥통과 같다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부엌에서
가장 어리석고 아둔한 음운을 가진 부속
사랑이 그렇게 둔탁한 발성과
모서리 없는 몸을 가졌다는 걸
일찍이 알지 못했네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 왔을 때
속이 비쩍 다 마르도록
전원을 끄지 않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너의 이름을 부른다
난...나를 부르는 줄 알고....얼떨결에 이 시를 퍼 왔습니다.^^
흠, 밥통이라.......버벅대며 사는 내 꼬락서니가 딱 밥통 그거지요.
연초라서 좀 그렇지만 밥통 같은 이야기나 해볼까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지만 우리 집에서 지척 거리에
스크린골프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우연히 시장점유율 1위라는 스크린골프 사이트에서 번지수로 알아냈다.
온천입구 사거리 근처 K보일러 대리점 2층에 그 스크린골프방이 있다.
작년 연말 처음 찾아갔을 때는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오픈은 2007년에 했다니 몇 년 되었고 시스템은 단 두 개.
주인은 사십 근처로 보이는 여자였다.
혼자 한 라운드해도 되냐고 물으니 그럼요 하며 반긴다.
초창기 시스템이라 그런지 특이하게도 오비티도 있다.
45분이면 18홀 라운드가 가능하니 퍼뜩 치고 가야지 싶었는데
어랍쇼 스코어가 엉망으로 나오는 것이다.
스크린골프 라베는 77타, 핸디를 13까지 낮추었는데 왜 이 모양일까.
그 다음날 중앙동에서 고교 동창들이 모여서 한 스크린하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혼자서 다 먹여 살리는 불상사가 예상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지 잘 안되네요."
멋쩍어서 요금 계산을 하면서 말했더니 여주인이 묻는다.
"몇 개나 치셨는데요?"
"94개요. 근래에는 90개는 잘 안 넘는데............"
"에덴밸리, 좀 어려운 코스이긴 한데........"
여주인은 코스별 난이도까지 꿰고 있다.
"오비도 몇 방 있었지만 퍼팅도 안 되니 영........"
그런저런 대화 중 여주인 핸드폰이 울린다.
"자꾸 전화하지마라. 언자 더 이상 돈 없다. 이 밥통아!"
헉, 거기도 나 비슷한 다른 밥통이 있나보다.
여주인은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음 날, 중앙동에서 붙은 스크린골프에서 83개를 쳐서 중간은 했다.
밑에서 받아서 위로 전달해주는 제일 속편한 포지션이다.
필드엘 주로 나가는 친구들인지라 스크린골프는 좀 안될 수도 있다.
그런데 세무사인 친구의 평으로는 내 골프가 좀 견실해졌다고 한다.
전날 혼자서 연습으로 칠 때 아웃코스에서 아이언 거리가 자꾸 짧았다.
약간 뒷땅을 치기 때문이라 생각되어 공부터 쳤더니 한결 나아졌었다.
예습해서 좀 재미를 봤으니 (재미 봤다는 말.........좀 그렇긴 하다 -_-)
복습도 해야지 싶어서 전철에서 내려 또 그 스크린골프방으로 갔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두 방 모두 손님이 가득이다.
갤러리로 구경이나 좀 해야지 싶었는데 모든 문이 닫힌 실내에서
어찌나 담배들을 피워대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십여 년 전에 내가 담배를 피울 때 아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제일 후회되는 게 끽연이었다.
한 10년만 더 일찍 끊었으면 좋았을 것을.......싶었다.
동네 사랑방 같은 골프방이니 국민건강진흥법 이런 건 안중에도 없다.
한 라운드가 끝나고 돈 좀 잃어 열 받은 그날의 호구 제의로
18홀을 더 돌기로 하고 로그인을 하는데 프로 모드로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귀가하기 위해 카운터를 지나며 주인에게 물어봤다.
"여긴 아마추어 모드가 아니고 프로 모드로 칩니까?"
"예, 손님들이 모두 그걸 원해서요........처음부터 그랬는데요."
"그럼 그저께 나도 프로 모드로 친 겁니까?"
"예."
흠........그랬었구나.
스크린골프에서 아마추어 모드와 프로 모드의 차이는 크다.
우선 비거리가 5%정도 차이가 난다.
훅과 슬라이스도 아마추어 모드는 20% 보정이 된다.
프로모드에선 퍼팅도 세게 맞으면 방향이 맞아도 홀을 그냥 지나친다.
바람 영향도 많이 받고 뒷땅은 여지없이 한두 클럽 거리 손실이다.
"그래서 그저께 내 스코어가 그렇게 나왔군요."
"여긴 오래된 손님들이라 그렇게 해서 다들 잘 치세요."
그래서 매장 랭킹 상위에 있는 사람들의 핸디가 1, 4, 7.......인가 보다
그 정도라면 아마추어모드에서는 손쉽게 언더파도 기록할 것이다.
그러기에 전국 순위도 근16만 명 중 4천, 7천 등등의 순위인가 보다.
스크린골프방 여주인과 안면이 익으니 오며가며 가끔씩 들리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과도 통성명을 하고 가끔은 같이 공을 치기도 했다.
그저께 여느 때처럼 외출 후 집으로 가다가 또 들렀다.
여전히 방 두 개 다 손님들로 꽉 찼다.
또 여주인의 핸드폰이 울린다.
왜 그 모양이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나..........끝내 ‘이 밥통아’로 끊는다.
흠, 밥통........아무래도 꼭 나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궁금해서 물었다.
"얼마 전에도 전화 왔던 그 밥통입니까?"
"아 예. 친군데.......내가 그마 속이 터질라 캅니더.
내가 글재주가 있음 이 이야길 써서 동네방네 다 알리고 싶네예."
"무슨 일인지.........궁금하네요. 나도 글재준 없지만........"
"그럼 차나 한잔 하시면서 한심한 내 친구 이야기나 들어보이소."
밖엔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룸에선 나이스 온.......하는 기계음이 들리는
스크린골프 대기실 라운드테이블에서 여주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친구가 그 남자를 만난 건 남자의 딸 때문이었어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놀이터를 배회하는
그 아이가 불쌍해서 집으로 데려온 게 화근이었다.
평소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구가 아이를 씻긴 후 보니
의외로 예쁘장한 얼굴에 귀염성도 있었다.
들어보니 엄마는 집 나간 지 오래고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거였다.
아빠는 밥만 한 솥 지어놓고 돈 벌러 나가서 며칠씩 집을 비운다고 했다.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는 빈집에서 아빠를 기다리며
저 혼자 먹고, 자고, 놀고 그랬단다.
반 지하 셋방 아이의 집엔 전기밥솥 안에 누런 밥이 눌러 붙어 있었고,
반찬이라곤 달랑 김치 한 가지 뿐이더란다.
친구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아동 폭력이 따로 있나? 아동 학대란 말이 딱 이거였어.
세상에 어떻게 아이를 그런 환경에 내버려둘 수가 있노?
더군다나 여자아이를........ "
친구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딸이 갖고 싶어도 임신이 안 되었다.
셋방 주인에게 말하고 친구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딸이 없는 집안이라 식구들이 걔를 반겼다.
며칠 후 아버지란 사람이 아이를 찾으러 왔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핏발이 선 눈, 한눈에도 몹시 지쳐 보였다.
"애 엄말 찾아야 하는데.......여기저기 다니며 찾아봐도 종적이 없네요."
아이 엄마는 가난에 지쳐 집을 나갔다고 했다.
남편 사업이 부도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단칸방에 나와 앉기 전에는
그런대로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남자의 딱한 사정을 듣는 사이에 아이는 제 아버지를 할끔할끔 보면서
친구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엄마의 정에 굶주렸던 아이가 친구의 자상한 손길에 정을 붙인 것이다.
그날 이후 남자는 일하러 나갈 때마다 아이를 친구에게 맡기게 되었다.
친구는 친딸처럼 아일 거두었고 밑반찬을 그 집의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처음엔 동정이었고 연민이었다.
그 측은지심이 밥통 같은 사랑으로 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난리가 벌어질 줄도.
그런 그 남자가 마침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 흉기로 가족들을 찌르고
자해소동을 벌이다 이웃들의 신고로 경찰에 연행되었던 것이다.
남자가 휘두른 칼에 남편과 아들이 좀 다쳤고 친구도 팔이 부러졌단다.
스크린골프방 여주인은 병원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내가 죽을죄를 졌어."
불쌍해서 돌봐준 것이 사랑으로 전이되었고,
왜곡된 사랑은 집착과 광기로 변질되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처음엔 친구의 정성에 감복하고 황송해하던 남자가
그녀에게 엉뚱한 걸 원하게 되었고 모질지 못한 친구가
단 한번 그 밥통 같은 사랑을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
왜 갈등이 없었겠는가. 왜 번민이 없었겠는가.
후회와 죄책감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친구는
어느 날 남자와의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남자의 터무니없는 요구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웃들 눈길을 피해 그 남자의 집을 드나들 수도 없었다.
친구는 남자를 회피하고 전화를 따돌렸다.
남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차디찬 방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있을 때
당신은 따뜻한 방에서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하겠지?
가만두지 않겠어.」
회신을 하지 않았더니 남자는 곧바로 친구의 집에 들이닥쳤다.
시기 질투에 사로잡힌 그 남자는 가슴 속에 시퍼런 비수를 품고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하지만 친구도 이미 맹목이 되어 있었다.
"그 남자를 구해내야 해. 무기징역 받을지도 몰라. 어떡해........
변호사를 사야 되는데.......돈 좀 빌릴 데 없어?"
친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퇴원 후 백방으로 돈을 마련하여 그 남자를 구해내려고 애썼다.
"내 가슴에 손 좀 대봐. 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목이 콱 막혀 죽을 것 같아. 아아...... 답답해, 답답해!"
친구는 한밤에 전화해 하소연했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였다.
당연히 남편과 이혼을 했고 그 남자 옥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음식점에서 고기를 썰며 번 돈으로는 변호사를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친구랍시고 전화를 해서 돈 이야기를 한단다.
"번듯한 직업 가진 남편과 아들을 두고.......참 정신 나갔지요?"
그 때 왼쪽 좀 넓은 방의 문이 열리더니 여주인에게 주문을 한다.
"그 맨날 묵는........두부김치하고 막걸리 좀 시켜주소......"
"예.......알았심니더......."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들은 이야길 머릿속으로 정리 중인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 하고 문 닫는데 안에서는 나이스 버디! 라는 멘트가 울린다.
그렇게 소한과 대한 사이의 맹추위 속에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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