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을 돌아 가파른 골목길이 끝나면 금정산 제10등산로 초입이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새소리도 들린다.
그 소나무 숲을 따라 오른편은 완만히 올라가는 길이 있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좀 가파른 길이다.
천천히 뭔가를 생각하면서 걷고 싶으면 오른편 길을 택하고
근자에 운동 부족이다 싶으면 왼쪽 길로 오르면 된다.
겨울 숲은 고즈넉하지만 나름대로 포근한 느낌도 있다.
왼쪽 길로 오를 예정이었지만 그냥 오른쪽 편한 길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암자를 지나자 남녀 등산객들이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
".............그러니까 타이거 우즈가 맞아도 싼 기라."
"하모.......그렇고말고."
여자들의 말은 단호하다.
"그래도 그렇지 골프채로 남편을 스윙 하모 우짜노........"
"그거 잘못 맞으면 그냥 골로 갈 수도 있는데."
남자들은 타이거 편인 모양인데 좀 기죽은 목소리들이다.
"하이가.........아저씨요. 아저씨도 그리 생각하요?"
자기들끼리 다툴 일이지 지나가는 나에게도 불똥이 튄다.
"예? 뭐 말인데요?"
짐짓 모르는 채 시치미를 떼고 본다.
"그 있잖아예,......골프 황젠지 하는 사람 바람피우다가
마누라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거 몰라예?"
"아, 예........글쎄요."
애매하게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 아저씨도 남잔데 당연히 이 사람들 편이것제."
다른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한 마디 얹는다.
"커피라도 한잔 하실라요?"
남자들이 원군을 만났다는 듯 커피를 권한다.
"아뇨.......아까 마셔서.......전 하루에 한잔만 마시기에."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실속 없이 성가신 건 이제 딱 질색이다.
'다음엔 3번 아이언 대신 드라이버로 두들겨 패요.'
우즈 부부 결혼을 중매했던 예스퍼 파르네빅이 그렇게 독설한 후
미안하단 말을 우즈의 부인인 엘린에게 했다고 한다.
골프 황제의 처지가 말이 아니게 된 셈이다.
그냥 추켜세워 주는 말이지만 황제, 여제 이런 호칭이 아무에게나
붙는 말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우즈도 한 가정의 가장, 한 아내의 남편, 아이들의 아버지인 만큼
보통의 남자들과 똑같은 의무가 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군왕무치라고 옛날 임금들은 허리 아래에 관한한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여자를 밝혀 후궁을 많이 두는 것도 유력자와 인척관계로 엮여져 왕실을
공고하게 하니 나라를 위한 것이 된다.
궁궐을 크게 짓는 것도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고
난폭하고 무례한 것도 국왕의 위엄을 드높이는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궁궐의 아무 궁녀나 무수리와 관계를 할 수 있었다.
내시들은 빙 둘러서서 가려주고 옷을 벗어 자리까지 봐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분별하게 많은 여자와 몸을 섞으니 수명이 짧을 수밖에.
기름진 음식에 운동 부족도 평균 재위기간 18년밖에 안 되는 원인이었으리라.
타이거 우즈는 사건 후 며칠 만에 밝힌 사과문에서 자신도 인간인지라
잘못이 없을 수 없고 완벽하지 못하고, 또 사생활이라는 변명도 했다.
그 옛날의 임금들에 비하면 참으로 처량한 신세의 황제이다.
신기에 가까운 골프 실력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란 생각도 든다.
완만한 경사의 길인지라 땀도 별로 안 나고 휴정암에 도착했다.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 들이켜니 속이 시원하다.
내친 김에 세수까지 하고 나니 정신까지 맑아지는 듯싶다.
휴정암을 거쳐 남문 쪽으로 오르다가 오래 전에 보았던 노인을 만났다.
퍼시먼 3번 우드를 지팡이 삼아 내려오던 분.
친구가 다 죽어 같이 공칠 사람도 없다며 그 우드를 나 가지라고 하셨던.
"여전히 건승하시군요."
"누구.......시던가........?"
노인장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금강공원에서 뵀었지요........작년 오뉴월인가에."
"에이.........난 지난 달 일도 아슴아슴한데........."
"아 그러네요........저도 가끔 그렇답니다........."
"벌써.......?"
"저기 케이블카 정류소 옆에 가서 제가 막걸리라도 한 잔 올릴까요?"
"어......,,그리 고맙거로?"
입맛을 쩝 다시시는 것이 마침 컬컬하셨던 모양이었다.
도로 내려오는 길을 걸으며 노인께서 말을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저 소나무 잣나무가 그 시절에 심어진 나무들이야.
5.16 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였지.
부산시내 유흥가에 독버섯처럼 붙어살던 깡패, 양아치들과
완월동 몸 파는 아가씨들을 나라에서 강제로 이주시켰어.
산성 남문 분지에 천막집이 칸칸이 지어졌고
낮에 산림녹화사업을 하고 밤엔 청춘사업을 벌였었어.
벌써 반세기나 된 이야기지만 그들이 다 떠난 지 오래고
무너진 성 돌만 남은 자리에 저리도 나무가 짙푸르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인은 그 때 그 시절을 더듬듯
아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댄서들처럼 겨울바람에 춤추는 억새들 앞으로 나무들은
푸르고 청정한 그들의 젊은 혼 인양 동래산성에서 자라고 있다.
저 노인은 그 때 어느 편에 있었을까.
양아치나 깡패였을까.........아니면 감독관이었을까.
말투로는 아마도 감독관이나 경찰 쪽일 가능성이 컸다.
막걸리를 드신 노인의 하산길이 걱정되어 케이블카를 태워드렸다.
금강공원에서 노인과 헤어졌다.
다음에 보자며 손을 흔들고 가셨는데 또 기억하지 못할 듯싶다.
이제 언제나처럼 전례와도 같은 족탕을 하러 간다.
도로공사 때문에 늦여름 가을 초까지 닫았던 노천족탕이다.
따뜻한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또 세월을 되감기한다.
그 노인네가 금정산 녹화사업 할 무렵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5.16 쿠데타로 직장을 잃으신 망부께서 자포자기로 그러셨는지
급기야 바람까지 피우신 것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께서 나를 대동하고 그 집으로 찾아갔다.
월영동 계단식 집 아래채에 그 여자의 셋방이 있었다.
주인집 마루에 앉아 마산 앞바다를 보며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아빠가 되면 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
내 아버지가 그러시는 것은 어린 나에게 충격이었다.
타이거 우즈야 워낙에 출중한 사람이니 실수로 쳐 줄 수 있어도.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엔 생각이 바뀌었지만.
망부께선 3형제 중 막내이셨다.
그래서인지 책임감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좀 모자란 듯싶었다.
막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장차남과는 뭔가가 달랐다.
하고 싶은 것은 자기 처지에 불구하고 꼭 해야 하는 거 등...........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그 옛날의 그 결심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내를 몸으로 배신한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잘나지 못하고 돈도 많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마음으로 한 간음을 어쩔 건데’ 하고 다그치는
또 다른 나에게 나는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젠 딸 아이 또래에겐 그런 마음이 덜 하다.
대신 아가씨들을 딸아이와 비교를 하는 것이다.
에구, 우리 OO도 저렇게 날씬했으면.........
흠, 저 아이가 좀 예쁘지만 그래도 우리 OO가 더 낫지 등등.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시계를 본다.
아직 한 5분은 더해야 30분을 채운다.
그 때 아까 등산로 초입에서 본 두 쌍의 남녀가 족탕을 하러 온다.
5분여 남은 시간에 불구하고 서둘러 족탕을 마치기로 했다.
"옴마야, 아까 그 아저씨 또 만났네."
한 여자가 아는 체 한다.
"벌써 다 했능교......."
남자들도 반갑다는 듯 말을 건넨다.
"아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자리를 잡는 모양새가 부산스럽다.
마침 맞게 내 주위에 두어 개 자리가 났다.
그에 맞추어 나는 양말을 꿰신고 등산화를 신었다.
우즈 이야기가 또 나오면 이번엔 여자 편을 들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우즈의 생크라는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나라고 무슨 대단한 도덕군자가 아니지만.
모르긴 해도 내가 우즈라면 아마 더했으리라는 짐작도 들었다.
농심호텔을 돌아 곰장어 굽는 냄새 진동하는 허심청 쪽으로 걷는데
짧은 겨울해로 어느새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올 해도 이십 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또 하나의 나이테를 더해야하는 연말이다.
올 한해 뭘 하면서 세상을 살았을까.
참으로 허허로울 뿐이다.
쏜살같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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