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달포 만에 내려온 부산에도 가을색이 완연하다.
억새 춤추는 늦가을 영남 알프스로의 산행,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물론 소울 메이트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내려온다고 미리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또 불쑥 찾아가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핸드폰을 꺼낸다.
몇 년 전에 썼던 하이쿠를 친구에게 보냈다.
'11월' 이란 제목이다.
늦가을 포장마차
따끈한 우동 한 그릇
그 앞에 놓인 11월
곧 내 핸드폰이 부르르 떤다.
"그 우동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 지금 어디냐?"
"음... 전철 안."
"알았다."
중앙동역에서 내리려다 자갈치까지 갔다.
오랜만에 회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져갈 거라고 모둠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바로 그 때 젊은 여자가 와서 똑같은 것을 주문한다.
30대 중반...........이나 될까.
단골이니 좀 많이 달라느니 걱정 말라느니 대화가 오간다.
먼저 받아든 나는 전철을 타러 갔다.
부둣가에도 낙엽이 흩날린다.
일요일 근무는 그야말로 시간 때우기여서 지루할 것이다.
작년 이맘때는 낙엽이 성가실 정도로 흩날리더니 오늘은 깨끗하다.
"청소를 열심히 한 거야?"
군산CC에서 열리고 있는 매치플레이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던
친구는 언제나처럼 반색을 한다.
"아니.......바람이 다 쓸어주잖아... 일일이 쓸 순 없는 일이고."
"이거 금방 회 뜬 거니 한 점 집어봐."
"음, 싱싱해서 먹음직하군, 그래. 제수씨는 여전하시고?"
"덕택에........가만 있자.......저 정도 거린 안 들어갈 확률이 더 높지?"
정재훈 프로의 17번 홀 파 펏이다.
"글쎄 말이야. 평상심을 가질 수가 없을 테니......"
그 파 펏이 홀을 비껴가는 순간 누군가 괴성을 지르며 그린으로 들어와
우승자 이기상 프로를 껴안는다.
2&1으로 패한 정재훈 프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돌출행동이다.
친구가 혀를 쯧쯧 차며 TV를 꺼버린다.
"도대체가 남 생각은 조금치도 않는 사람이군."
"그러게 말이야.........패한 정 프로는 오늘 밤 잠이 오겠나........"
"참 여자 대회는 어떻게 됐는데?"
"얼짱 최나연프로가 우승했어."
"허......아까 자갈치에서 볼 때만 해도 오리무중이더니......"
그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청색테이프 붙인 견인통지서를 든 남녀가
씩씩대며 사무실로 들이닥친다.
"아니........아저씨요, 그 잠시 동안에 차를 끌고 오모 우짜요......"
"딱 십분인데.......너무하네, 정말."
"아니, 왜 여기 와서 이러세요.......여긴 견인보관소 아닙니다."
"그라모.......견인보관소는 어디라요? 여기 제1부두 어쩌고 써 있는데."
친구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응수한다.
"저기 보이지요? 주차장에서 나가서 백 미터 더 걸어 가이소."
두 남녀는 미안하단 말도 없이 휑하니 나간다.
"견인보관소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
"그렇겠네......거의가 열 받은 사람들일 테니......."
"만날 싸움이야... 저기 근무하는 사람들 참 애로사항 많다."
"불법주차를 하고는 외려 더 화를 낸단 말이지?"
"음........거의 구십 퍼센트 이상은 다 그렇대."
한번은 경찰까지 오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난 중년부부가 견인료를 지불하고는 자기 차를
견인보관소 입구에 세우고는 문 잠그고 꼼짝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견인차가 못 들어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견인되었던 차들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명백한 업무방해인데 대책이 없는 상황.
그러다보니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순찰차를 타고 경찰관 두 명이 왔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견인보관소 경리가 주차장으로 달려와 사정을 했다.
우선 나가는 차라도 나갈 수 있도록 주차장 쪽 펜스를 좀 해체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사정이 딱하다 보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경리가 제법 미인이거든......."
"호오........그래서 허락해준 거야?"
"꼭 그래서는 아니고.......그래도 싸울 때는 당차게 싸우더라."
"몸싸움까지 한단 말이야?"
"그럼, 같이 붙들고 뒹굴어버리지.........여자니까 때리진 못하고........"
"허어.......견인보관소에서 화난 사람들 좀 진정하라고 미인계 쓰다가
여차하면 야차로 돌변하는 격이구만."
"장미의 가시랄까........그래도 우리완 친하게 지내........잔정도 있고."
"그래........어떤 건데?"
"이를테면 빵을 좀 사가지고 가다가 몇 개 넣어주고 간다든지......"
"흠........그렇구먼........그런데 일요일에도 차 견인을 해 오나?"
"구청에서 단속만 하면 자기들은 얼씨구 하지."
그 때, 자갈치시장에서 본 그 여자가 사무실 앞으로 온다.
"이거 좀 드이소. 싱싱해서 좀 가져.........."
나를 쳐다보곤 말을 하다가 중단한다.
"아이고, 뭘 또 이런 걸........우린 만날 얻어만 먹고........"
자세히 보니 견인보관소 경리는 친구의 말대로 상당한 미인이다.
친구는 몸매도 날씬한 그녀에게 회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내 친구가 회를 사왔으니 이건 기사들 하고 더 나눠 드세요."
배시시 웃다가 인사를 하고는 그냥 견인보관소 쪽으로 가버린다.
"이거 큰일이네, 이 많은 회를 어쩐다.......일단 먹기나 하자."
"흠, 널 좋아하나 보다?"
"별 소릴.......견인소보관소가 여기 올 때 내가 정보를 좀 줬지."
"무슨 정보?"
"철도부지 관할하는 코레일지사의 누굴 찾아가면 된다는 거........"
"그건 그렇고........니 비번 때 산에나 같이 함 가자."
"등산 말이가........골프 말이가......"
"둘 다."
"음.......난 요즘 스크린 골프만 하는데."
"스코어는 어떻게 나오더노?"
"잘 치면 열 개 오버, 못 치면 스무 개도 넘기고......."
"야, 그래도 대단하다.........스크린골프지만 거의 싱글에 근접하고."
"그게 또 거품이지......필드 나가면 거기서 여남은 타 얹어야 해."
"난 스크린골프는 퍼팅이 어렵더라."
"스크린 퍼팅이 더 쉽단 사람들도 있고......"
친구나 나나 처음엔 30타 이상 오버를 했었다.
친구는 슬슬 약이 올라서 잘 안 가던 연습장에도 가끔 가고
집에서도 짧은 채로 빈 스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다음 번에 가서는 25타, 그 다음엔 20타.........그렇게 줄어갔다.
물론 인터넷으로 '스크린골프 잘 치는 방법'을 죄다 검색해서 읽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인가 80대 초반을 치게 된 것이다.
필드에서는 결코 기록해보지 못한 스코어였다.
그러다가 필드에 나가면 여전히 보기 플레이어.
필드와 스크린골프는 엄연히 다른 골프였다.
"명품 짝퉁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 알 거 같더라."
"흠, 골프가 명품이고, 스크린 골프가 필드의 짝퉁이란 말이지........?"
"그런 셈이지. 값이 싸서 손쉽게 가질 수 있어 대리만족이 되고."
"그나저나 언제 그렇게 연습을 많이 했노?"
"나 지금은 스크린골프 라운드 횟수가 스무 번이 넘어."
"헉, 나 없는 사이에 그렇게나.........열 번도 더 갔네."
"첨엔 조를 짜서 스크린 골프를 했잖아.
그런데 그게 성가시고 쉽지가 않더란 말이야........니도 없고"
"그래서?"
"혼자 가서 친 거야."
"혼....자서? 한 명 플레이도 되는 거야?"
"아, 그럼, 업주에겐 마찬가지 돈이잖아."
"글쿠나.......혼자 치면 빨리 끝나니까.......그게 그거네."
금정구 체육공원인 스포원에 가면 새벽 6시부터 라운드가 가능하다.
공공시설이니 평일 오전에는 18홀 스크린 피가 단돈 만원이라고 한다.
연습장 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그물망 연습장엔 대부분 혼자 가지 않는가.
이번엔 질 수 없다는..........비수를 갈기 위해서.
"술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독작을 한다더니........."
"마찬가지야. 연습장 가서도 몸 좀 풀고 나면 이미지 라운들 하잖아."
"맞아. 잘 가는 골프장 한 홀 한 홀 떠올리며 드라이버 잡고
칠 번 아이언 치고 어프로치까지 하잖아."
"바로 그거지. 스크린 골픈 훨씬 더 현장감 있어. 눈에 보이니까."
"그래도 그렇게나 스코어가 줄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네."
"당장 내일이라도 함 치자고.......직접 보여줄 테니."
"비법이나 요령도 있을 법 한데?"
"오비야. 오비만 안내면 가능하지."
"어이, 누가 오비 내고 싶어서 내냐?"
"그 때 내가 한 라운드에 오비 여덟 방내는 거 봤잖아?
그런데 요즘은 한두 방으로 그치거든.
그 약은 네시에서 열시 방향으로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거야."
백 미터만 보낸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힘을 뺀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실천이 쉽지가 않은 모든 골퍼의 로망이다.
힘 빼니 공이 똑바로 200미터 이상 날아가더란다.
네 번 동안의 72홀 스크린골프에서 오비가 단 한 방인 적도 있었다고.
더구나 스크린골프는 오비 티가 없으니 오비가 더 쥐약이다.
"이젠 스포원에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그러자고. 비록 짝퉁이라도 많이 치면 필드에서도 훨씬 나아질 거야."
"음, 스윙 무너진다고 스크린 싫다는 넘 불러다가 혼 내줘야지."
"누군데?"
"있어. 싱글이라고 자랑을 하다가 막상 붙으면 핸디 짠 넘."
"로우 핸디캐퍼들 행패지. 배판에 배배판까지 만들어 회수하고."
"그래도 명분은 있잖아, 그렇게 짜야 하수들이 연습을 한다나........."
"그 말도 일리는 있어."
"골프가 명품 스포츠는 맞는데, 참 문디 같은 운동이다, 그쟈?"
"조금만 소홀하면 앙탈을 부리니........미인하고 살면 그렇다던데."
"어, 그래? 니 마누라도 장미잖아?"
"무슨........마누라는 우리 나이엔 친구잖아."
그렇다.
아내는 사반세기 이상을 같이 살다보면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된다.
이번에는 꼭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아내의 당부가 떠올랐다.
같이 늙어가는 아내가 장미라면, 가시 없는 순한 장미이리라.
이제 점점 날씨도 추워진다.
올 겨울에는 추운 필드에서 내 돈 내고 떨면서 골프를 하느니
비록 짝퉁일지라도 따뜻한 스크린 골프방에서 힘이나 빼야겠다.
비방이라는 '네 시에서 열시 방향으로'........를 터득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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